참가자 정보
박정현(오블리크)
오블리크는 직선적인 서사와 단일한 해석을 거부하는 1인 출판사입니다. 오블리크는 시장성보다 진심을, 효율보다 감응을 신뢰합니다. 상품의 언어가 책을 점령한 시대에 우리는 팔리기 위한 책이 아니라 태어나기 위해 쓰인 문장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존재해야 하는 문장, 팔리지 않아도 쓰여야 하는 이야기가 오블리크의 출판을 이룹니다. 우리는 완성보다 흔들림을, 해석보다 파편을, 기획보다 사유의 고통을 사랑합니다. 오블리크의 책들은 어떤 질문도 끝내 완결하지 않으며, 불완전한 사유의 지대에서 말보다 앞선 감각을 포착하고자 합니다.
대표이자 작가 박정현은 2004년생으로 체제와 구조에 대한 반항에서 출발해 자신의 문학적 세계를 구축해왔습니다. 일찍 학업 제도를 벗어나 비평과 창작을 오가며 사유의 공간을 확장했고, 세 편의 소설『실존의 무경계』, 『허울』, 『익사연습』으로 첫 응답을 내놓았습니다.
E-mail : mango040923@naver.com
『실존의 무경계』는 구조의 안온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하나의 시도이자, 실존이라는 이름의 혼돈을 정면으로 응시한 이야기집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모호하고, 시라고 단정하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며, 동화의 단순함과 그로테스크한 감각이 공존한다. 때로는 희곡의 형식을 빌리고, 때로는 시적 단편으로 흩어지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문학적 질서를 세운다. 말하자면, 『실존의 무경계』는 탈장르의 서사로서, 독자에게 묻는다 - “당신은 구조를 믿는가?”
이 책을 기획한 동기는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사회의 규칙, 제도의 법칙, 언어의 문법 속에서 ‘질서’를 배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실재일까? 어쩌면 구조란 인간이 혼돈의 공포를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일지도 모른다. 구조는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억압한다. 그것은 질서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가두는 감옥이다. 『실존의 무경계』는 바로 그 감옥의 문을 흔든다.
이 책의 열세 개 이야기는 각기 다른 형식과 목소리로 실존의 균열을 그린다. “달팽이”는 폐쇄된 공간에서 피어나는 자기세계의 부패를, “익사 연습”은 죽음과 탄생의 뒤섞임을, “숨바꼭질”은 존재의 부재와 놀이의 역설을 탐구한다. “머리카락”은 과거의 잔재가 육체로 귀환하는 공포를, “주사위를 굴려”는 우울과 무작위성의 운명을, “완벽한 자두나무”는 복수와 변이의 숙명을, “누구와 함께 밤을”은 사랑과 망각의 경계를 묻는다.
이어 “숙주”는 증오의 임신이라는 극단적 은유로 가족과 폭력의 연쇄를 그리며, “폭소”는 웃음이 어떻게 저항이자 파멸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식사”는 인간의 윤리와 식욕이 충돌하는 죽음의 연극이고, “부검”은 진실을 해부하는 행위가 곧 자기 해체임을 드러낸다. “막간”은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허물며 삶 그 자체를 허구로 드러내고, 마지막 “이호와 이호”는 동일한 이름을 지닌 두 인물을 통해 존재의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완전히 소거한다.
구조가 붕괴된 자리에서 인간은 무엇을 붙잡을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을 던지며, 독자를 익숙한 언어의 질서 밖으로 밀어낸다.
단편소설집 『허울』은 『실존의 무경계』에 이어 박정현이 오블리크에서 출간한 두 번째 소설집이다. ‘허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정체성, 사회적 역할, 타인의 시선과 같은 외피가 무엇을 감추고 또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집요하게 탐문한다. 현실과 환상, 자기와 타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의 내면을 예리한 시선으로 파고들며, 표면 아래 잠재한 불안과 소외, 존재의 균열을 서늘한 언어로 포착한다. 각 단편은 기성 구조의 병폐를 비판하는 동시에 진실과 허위, 존재와 부재의 모호함을 치열하게 탐색한다. 『허울』은 우리가 믿어온 ‘나’라는 실체가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드러내고, 그 허울이 벗겨지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공허와 가능성을 사유하게 하는 작품집이다. 새로운 시선과 감각,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이 책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깊은 질문과 오래 남는 여운을 남긴다.
『익사연습』은 물과 자궁,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이야기다.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매일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숨을 참는 남자, 민. 그에게 삶은 축복이 아니라, 동의 없이 주어진 고통이다. 그는 ‘익사 연습’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소거하려 하지만, 그 행위는 오히려 생에 대한 가장 강렬한 욕망의 발현이 된다.
민의 곁에는 연인 유영이 있다. 그녀의 사랑은 끝없는 바다처럼 깊지만, 그 사랑조차 민을 완전히 구하지 못한다. 민은 여전히 세상과 자신 사이에 얇은 물의 막을 두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유영의 임신 소식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불안을 불러온다. 민은 자신을 파괴했던 아버지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원치 않는 삶을 또 다른 존재에게 물려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 불안의 그림자처럼, 유영은 기이한 꿈을 꾼다. 뱃속의 아이가 말을 건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 목소리는 생명이 스스로 존재를 거부하는 절규이자, 태어남이라는 폭력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이다.
아이의 심장이 멎고, 부부는 깊은 상실의 시간을 맞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은 바로 그때, 유영의 자궁에서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 아이 대신, 그곳에는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연꽃은 슬픔의 잔해 속에서 자라난 또 다른 생명이자, 상실이 남긴 형이상학적 증거다. 민과 유영은 그 연꽃을 바라보며 다시 묻는다. ‘탄생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익사연습』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 - “자기결정권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에 대한 작가의 가장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대답이다. 물은 모체이자 무덤이며, 연꽃은 죽음 속에서도 피어나는 구원의 은유다.
삶과 죽음이 뒤섞인 물의 심연 속에서, 이야기는 독자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어떤 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후회를 배운다.”